박수가 없는 음악회


현대사회는 요란하다. 요란하여야 뭐라도 되는 것처럼, 시끄럽다. 그래서 TV라도 틀라치면, 요란 벅적한 것들로 세상이 난리가 난 것 같다. 한시라도 주목받지 못하면 죽는 양, 정치꾼들도 떠들어대고, 데모꾼들도 아우성이고, 거기에 패널과 뉴스앵커까지 목에 핏대를 세우니, 우리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은 난장판이 따로 없다. 어떻게 하면 본인을 드러낼 것인가, 그러하니 남의 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주장만 내지르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메아리가 없다. 주장과 주장이 공중에서 아우성치며 헤맬 뿐, 다시 메아리가 되어 어떤 이에게 파고들어와 가슴을 뜨겁게 덥히는 법이 없다.

우리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께서는 시험에 나온다거나 중요한 단락은, 큰 소리로 강조해주셨다. 그것들만 모아서 공부해도 웬만큼 성적은 나왔다.

몇 년 전 TV에서 어느 유명 교수의 철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의 강의내용이 워낙 좋아 인기 프로그램이었지만, 목이 쉴 정도의 큰 소리로 모든 음을 강조하며 핏대를 세우는 바람에, 강의를 조금만 들어도 피곤하였다. 뿐만 아니라 똑 같은 톤이어서 무엇을 강조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전달력을 위해서는 중·고등학교 때의 선생님처럼 필요한 곳만 고저장단을 적절하게 섞어 강조해 주면 더욱 좋은 강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운드를 키워야만 강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작게 말하거나, 때로는 침묵도 엄청난 강조가 될 수 있다. 웅변조로 외치듯 말하는 것보다, 작은 소리로 조근 조근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덜컹거리는 기차간에서 졸고 있다가, 기차가 멈추어 조용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눈이 떠지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또 펄펄 끓는 물에 손을 데었을 때 큰 소리로 ‘앗! 뜨거’ 하는 사람은 없다. 정말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들리지도 않는 작은 신음소리로 놀라듯이 말할 것이다. 소리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욱 뜨겁다는 것을 반증한다.

크게 외치는 것도 강조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이 중(中)중에 중(中)이라면, 작게 속삭이거나 침묵하여 강조하는 것은 상(上)중에 상(上)이라 할 것이다.

음악에서도 어느 부분을 강조하기위해 ff에 악센트까지 동원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또 어떤 작곡가는 강조하는 것이 어찌나 간절했든지 ffffff까지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음악에서도 크게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잘못하면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쉼표가 없는 음악은 음악이 아니다. 현악기는 관악기나 성악과 달라 쉼표 없이 계속해서 연주할 수도 있지만, 현악기에게도 쉼표는 꼭 필요하다. 그렇다. 음악에서도 역시 최고의 강조는 ppp의 작은 소리, 더 나아가 침묵이다. 음악이 고조되어 클라이맥스로 치닫다가 느닷없이 중단되는 잠깐의 침묵,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그때의 전율,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강조가 아니겠는가? 가끔은 그 전율을 느낄 새도 없이 박수를 치는 사람이 있어 문제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하긴 곡이 끝나고 연주자가 연주동작을 풀기도 전, 곡의 엔딩을 알고 있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그 고요함의 감동을 느낄 새도 없이, 무섭게 박수를 쳐대는 무례한 청중들 때문에 분위기를 망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교향곡이나 협주곡을 연주할 때 악장과 악장사이에는 박수를 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침묵을 즐기라는 것이다.

요사이 사회자가 있는 음악회가 많아졌다. 이는 청중들을 음악에 좀 더 쉽게 다가가게 하려는 좋은 시도이다. 그러나 연주자들은 청중들의 박수와 환호를 먹고 산다며, 사회자가 박수와 브라보, 혹은 휘파람 등을 노골적으로 유도하며, 시끄럽고 요란한 음악회가 무슨 좋은 음악회인양 이끌어간다면 문제가 있다. 가끔은 연주자가 노골적으로 청중의 박수를 유도하는 음악회도 몇 번 보았다. 이는 정말이지 박수를 구걸하는 것 같아 보기가 민망했다.

나는 몇 달 전 어떤 음악회에 갔다. 갈 때에는 박수를 열심히 치리라 마음먹고 갔다. 그 날의 주인공인 연주자는 감상에 필요한 약간의 해설과 함께 음악회를 시작하였다. 프로그램은 R. Schumann(슈만)의 Liederkreis op.24(리더크라이스)의 9곡과, Dichterliebe op.48(시인의 사랑)의 16곡이었다.

연주는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해 중간휴식 없이, 무대의 들락거림도 없이 쭉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시인의 사랑’의 마지막 곡 ‘Die alten, bösen Lieder’(오래된 불길한 노래)와 이후 피아노의 긴 후주로 음악회는 끝이 났다. 그러나 연주자는 음악의 여운에 취하였는지 고개를 들지 않았고, 청중들도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여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물론 박수도 칠 수 없었으며 앙코르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동안 박수가 없는 음악회를 이미 두 번 경험하였다. 첫 번째는 독일의 어느 자그마한 Schloss(城)에서 있었던 G. Mahler(말러)의 가곡연주회였고, 두 번째도 역시 독일 Karlsruhe(카를스루에)의 국립극장에서 들었던 F. Schubert(슈베르트)의 연가곡 Winterreise(겨울나그네) 연주였다.

몇 달 전의 그 음악회는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만끽한 음악회다운 음악회였다.

‘그래 맞아, 음악은 바로 이런 것이야. 그동안 세상살이에 바빠 잊고 있었네. 한국에서 시끄럽게 살다보니 잊고 있었네.’ 그런 마음이었다.

박수가 없었으므로 그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남아있다. 아마 평생 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음악회는 박수가 없는 음악회가 아니라 너무도 감동하여 박수를 칠 수 없는 음악회였다.

일찍이 인도의 시인 R. Tagore(타고르)는 우리나라를 일컬어 ‘동방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노래하였고, 일제강점기시대의 조윤제교수는 ‘은근과 끈기의 나라’라 하였다.

물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오는 음악회도 훌륭하고 감동에 찬 음악회일 수 있고, 또 세상살이도 좀 시끄러워야 사람냄새도 나고 살맛나는 세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녕 큰 환호와 박수, 세상살이의 시끄러움이 남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혹 너와 나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과시, 사욕, 이기심 때문은 아닌지...

그 동안 우리나라가 무엇 때문인지 많이도 경박스러워진 것 같다. 옛말에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다. 또 이심전심이란 말도 있다.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제 시끄럽게 떠들지 않아도 다 통하는, 다시 은근과 조용한 아침도 멋으로 받아들이는, 기품과 감동이 넘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오늘 저녁 또 한 번의 박수가 없는 음악회를 기대하며 음악회장에 간다.

(백석대학교 문화예술학부 교수, 한국작곡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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