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수(氷水)

연일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더워도 너무 더워서 찬물을 뒤집어쓰고 연신 차가운 음료를 들이킨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은행에서 시민 쉼터를 마련해주었다는 아침 뉴스를 들으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아...어린 시절 길거리에서 먹던, 머리까지 띵하던 냉차의 짜릿한 맛이 떠오른다. 밤이 되면 마당 가운데 평상에 모여 수돗물에 시원하게 담가 두었던 수박을 잘라 큰 양푼에 수저로 푹푹 떠서 채운 다음 설탕을 살짝 뿌리고, 새끼줄에 묶어 사온 커다란 얼음을 바늘과 망치로 콕콕 찍어 깨뜨려 넣어 만든 수박화채를 먹으면 그래도 여름이 견딜만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의 더위는 말 그대로 살인 더위다. 특히 우리나라는 불쾌한 습기로 인해 한낮의 온도가 52℃를 웃도는 중동의 국가 오만(Oman)보다도 더 견디기 어렵다고 한다.

다행히 회갑 기념으로 여행을 준비해준 큰딸 덕분에 하와이로 피서를 떠났다. 손자 둘과 함께 모두 6명이 커다란 자동차를 렌트하여 빅 아일랜드와 오하우 섬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광활한 자연과 용암, 그리고 바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고산지대 쪽에 위치한 마을은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조용하고 때 묻지 않은, 정말 평화로운 곳이었다. 마우나케아 천문대를 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visiter center까지만 올라갔다. 인터넷을 보고 커다란 타월을 미리 준비해갔지만 차에서 내리니 너무 추워서 냉동 창고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별과 차갑게 빛나는 달빛은 한여름 밤의 무더위를 완전히 날려버리기에 충분하였다.

열이 많은 체질인 손자들의 더위를 식히기 위해 하와이의 유명한 셰이브 아이스(문법적으로는 shaved ice가 맞으나 현지 간판에는 shave ice, 또는 ice shave로 표기되어 있었다)를 찾아 나섰다. 우리나라의 유명 연예인이 방문한 곳답게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며 메뉴판도 훑어보고 만드는 과정도 지켜보았다. 커다란 얼음을 통에서 꺼내어 기계로 갈아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알록달록한 시럽을 뿌려 무지개를 만들어 준다. 어린 시절 먹었던 불량식품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여기에 연유나 아이스크림, 또는 기타 토핑을 얹으면 가격이 거의 10달러를 넘는다. 단팥과 찹쌀떡, 각종 과일이 올라간 우리의 빙수보다 살짝 quality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큰 손자는 맛있는지 바로 옆에 앉았던 나에게만 한 입 주더니 순식간에 한 그릇을 뚝딱했다. 작은 녀석이 자고 있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역시 여름 간식의 왕은 빙수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빙수는 얼음을 잘게 부수어 눈과 같이 만들어 설탕과 감미료를 섞은 음료, 또는 잘게 부수어 팥이나 과일, 우유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만드는 음식이다. 사전에서 다른 단어를 찾아보면 단 얼음, 단물 얼음, 얼음냉수 등이 나오는데, 기원전 3천년 경 중국에서 얼음을 잘게 부숴 꿀과 과일즙을 섞어 먹은 것이 빙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기원전 300년경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점령할 때 더위와 피로에 지쳐 쓰러진 병사들이 높은 산에 쌓인 눈을 그릇에 담아 꿀과 과일즙 등을 섞어 먹었다고 하니 환경오염이 거의 없는 남극에서는 밖에 쌓여 있는 눈 웨에 토핑만 얹으면 바로 빙수가 되겠다.

우리나라는 고종 13년(1876년)에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 기수의 기행서인 일동기유(日東記游)에서 빙수를 먹은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생긴 모습이 얼음산 같으며 찬란하게 빛나고 맛은 달아서 먹을 만 하지만 한번 입에 들어가면 폐부까지 서늘해지니 이 또한 괴이하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동빙고, 서빙고의 얼음을 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궁중에서는 내빙고의 얼음을 잘게 부수어 역시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빙반(氷盤, 얼음쟁반)이라고 하여 얼음 위에 연근과 참외, 과일 등을 담아 먹으며 여름의 더위와 갈증을 달랜다고 하였다.

일본의 경우 11세기 한 궁녀가 쓴 수필집에서 ‘차가운 금속 그릇에 얼음을 칼로 깎아 넣고 칡즙을 넣어 먹었다’는 빙수에 관련된 기록을 볼 수 있다. 이후 개항과 함께 미국으로부터 얼음 제조기술을 배워 얼음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고 1887년에는 빙삭기를 발명하여 특허를 얻음으로써 본격적인 빙수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곱게 간 얼음을 그릇에 담고 그 위에 다양한 색깔의 시럽을 뿌린, 하와이의 셰이브 아이스를 닮은 카키코오리(かきごおり)가 대표적인 일본 빙수이며 축제와 페스티벌의 음식이 되었고 7월 25일이 ‘빙수의 날’로 지정되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아이스 카창(Ice Kacang), 홍또우삥(紅豆氷)이라고 부르는 빙수 역시 카키코오리와 흡사하여, 보통 세 가지 시럽을 빙수 위에다 따로따로 뿌려 주는데 빨강과 분홍색은 딸기 맛, 초록색은 사과 맛, 갈색은 커피 맛이다. 물론 시럽 이외에 여러 가지 토핑도 얹을 수 있다.

빙삭기에서 나온 얼음은 빙수의 품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과거의 빙수가 얼음을 잘게 부수어(crushed) 우박이나 진눈깨비 같은 입자를 형성하므로 빙수의 하단이 단단한 얼음을 형성하여 먹기 불편하였다면, 최근의 빙수는 마치 면도를 한 것처럼 눈꽃과 같은 고운 입자를 만들어주므로 마지막까지 부드러운 빙수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만 여행 시 열광하는 쉬에산(雪山)이 얼음을 매우 얇게 저며서 층층이 쌓아 올려 소스를 비롯한 여러 가지 토핑을 얹어서 먹는 음식으로, 망고빙수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밖에도 중국의 빠오빙(刨冰)과 필리핀의 할로할로(Halo-Halo) 등이 유명하며 이란에는 파루데(Fa loodeh)라는 국수를 얼려 만든 빙수가 있는데 이 욱정 PD가 요리인류 키친에서 파루데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빙수도 정말 다양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팥과 우유, 콩가루의 가장 단순한 메뉴로부터 각종 과일과, 차가운 빙수 속에서 쫀득한 식감이 살아난 미니 찹쌀떡, 콩가루, 견과류, cereal, 과자, 시럽, 우유, 미숫가루, 녹차, 아이스크림, 생크림 등 기호에 따라 다양하게 곁들여서 먹는 풍성한 빙수는 그야말로 환상이다. 칼로리로는 폭탄이 되겠지만.

호텔에서 파는 빙수는 작정하고 럭셔리하게 만들어 우유나 샴페인을 얼린 얼음을 갈아서 그 위에 애플망고를 올리거나, '펄 빙수'를 주문하면 프랑스산 진주귀걸이를 선물로 주기도 한다니 그 빙수의 가격은 얼마일까?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다는 24절기의 열세 번째 절기인 입추(立秋)가 8월 7일이다. ‘어정 7월 건들 8월’이라는 말이 있듯이 조금만 힘을 내어 견디다 보면 모기도 없어지고, 처량하게 우는 귀뚜라미 소리도 들려오고, 또 더위도 처분 한다는 처서도 다가올 것이다.

우리 모두 냉동실에 우유를 얼립시다.

그리고 빙수 먹으며 가을을 향해 달려갑시다.

사진 출처: 구글

WED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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