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실 안쪽 깊숙이 뻗쳐 들어오는 햇살이 확실히 부드럽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벼워 보이고
마트에는 벌써 봄채소들이 푸릇함을 자랑하고 있다.
싱그러운 굴 향을 음미하며 겨우 내 먹었던 김장김치가 이제는 묵은지의 모습을 하고 식탁에 올라오니 눈부터 지루하게 느껴진다.
달력도 한 장을 넘겨 3월을 가리키고 있으니 이제 나의 부엌에도 봄을 맞을 차비를 해야겠다.
가늘고 긴 녹색의 잎을 자랑하는 부추는 특히 봄의 대표적인 채소이다. 여러 해살이 풀이다보니, 한 번 심으면 봄부터 가을,
심지어 겨울까지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어서 달래나 냉이만큼 봄채소라는 인상이 강하지 않다. 전국 각지에서 재배하며 겨울 부추는 주로 영남 지역,
특히, 포항시의 특산물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여름 부추는 주로 경기도 지역에서 많이 생산한다.
한정록(閑情錄)과 산림경제(山林經濟)에 ‘부추는 한 번 파종(播種)하면 영생(永生)한다, 입춘(立春) 후 재를 뿌린 땅을 뚫고 싹이 나오면 채취하여 먹을 수 있다,
뿌리는 항상 그대로 두되 뿌리 나누기로 증식시켜 나가면 파종이 필요 없다’고 하니 후대 사람들이 부추를 게으른 사람의 채소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겠다.
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가 원산지이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서 재배하는 부추는 6세기 중국의 농업백과전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 이미 채소로 기록되어 있고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때 도입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기록에 나타난 것은 고려 때 편찬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서이다.
일본어로는 니라(ニラ)라고 부르는데, 가장 오래된 일본의 역사책인 고사기(古事記)나 노래책인 만엽집(萬葉集)에서 부추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편의점에서 파는 도시락이나 볶음요리에, 그리고 부추를 넣은 라면 등 지역과 요리의 종류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백합과에 속하는 부추는 구(韮) 또는 구근(韭根), 구채(韭菜)로 표기한다. 경상도에서는 정구지라고 하고 전라도에서는 솔 또는 소풀, 충청도에서는 졸,
제주도에서는 새우리라고 한다. 특히 경상도의 사투리로 알고 있는 정구지(精久持)는 한자어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정을 오래 유지시켜준다’는 말인데,
주로 부부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사이가 좋은 부부가 집을 허물고 부추를 심는다 하여 파옥초((破屋草))라 하기도 하고 중국에서는 음기를 돋우는 풀이라 해서 기양초(起陽草)라고 부를 정도로 부추는 양기를 회복하는데 좋은 식품이며, 사찰(寺刹)에서 먹지 않는 다섯 가지 음식물인 오신채(五辛菜)에도 해당한다.
우스갯소리인지 모르지만 게으름뱅이풀이라는 별명이, 하도 잘 자라서 게으름뱅이라도 기를 수 있다는 것과 부추가 정력에 좋으니 이 풀을 남편이 먹고 일은 안하고 집에서 아내와 뒹구는 게으름뱅이가 된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마누라가 ‘마, 거기 누(워)라’에서 나왔다고 하니 정말 신빙성이 있는 단어라고 하겠다. ㅎㅎㅎ
동의보감의 효능을 보면 부추는 성질이 따뜻하고 맛이 매우면서 약간 시고 독이 없어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위(胃) 속의 열기를 없애며 허약한 것을 보하고 허리와 무릎을 덥게 한다. 부추 씨인 구채자(韮菜子)도 성질이 따뜻하며, 허리와 무릎을 덥게 하고 유정(遺精)과 몽설(夢泄)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는데, 약으로 쓸 때에는 약간 볶아서 쓴다.
또한, 부추는 비타민A와 비타민C, B1, B2도 풍부하며 간의 피로를 해소하고, 피를 맑게 해주므로 즙을 내어 먹기도 하고, 간에 좋다는 다슬기로 만드는 올갱이국에 도 부추를 많이 넣는다. 독특한 향기와 매운맛은 황화 아릴(diallylsulfide) 성분에 의한 것으로 이 독특한 향과 알싸한 매운 맛이 입맛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요즘처럼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죽을 쑤어 먹거나 새콤하게 김치를 담가 먹으면 몸을 보하고 무기력증을 이기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부추에 들어 있는 알리신(allicin)이 돼지고기에 풍부한 비타민 B1의 흡수를 도우므로 돼지국밥에도 많이 사용하는데 돼지국밥의 간을 맞추는 새우젓에는 강력한 지방 분해 효소인 리파아제가 함유되어 있어 기름진 돼지고기의 소화를 크게 도와주게 된다. 경상도에서는 정구지찌지미라 하여 파전보다 부추전을 더 많이 먹으며 만두의 속 재료로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부추이다. 맛이 짜고 나트륨이 많은 음식인 된장에 부추를 섞으면 풍부한 칼륨이 나트륨을 제어해주는 역할을 하므로 된장국이나 찌개의 짠맛을 감소시키면서 비타민 A와 C를 보충해줄 수 있다. 이처럼 온기가 가장 강한 식물이라 상시 먹는 게 좋은 음식이라고 극찬 받는 부추는 가격까지 저렴하니 매우 훌륭한 식재료라고 할 수 있다.
봄은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오늘도 미세먼지는 ‘전국이 나쁨’이다. 부드럽게 삶아 얇게 썬 돼지고기에 부추를 듬뿍 넣고 새콤하게 양념한 수육무침과 푸름 가득한 부추전이 오늘 나의 식탁의 주인공이다.
공기청정기를 틀고 나지막하게 들리는 음악을 들으며 3월의 첫 주말을 집에서 즐겨야겠다.
마누라는 없지만 게으름뱅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