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대학교 외식산업과
백 승희 교수
(Nobember. 20. 2020)
트렌치코트를 입고 낙엽을 밟으며 고궁 담 길을 걸어볼 겨를도 없이, 겨울이 불쑥 찾아왔다.
계절이 바뀌었음을 실감하게 하는 작업은 옷장 정리와 먹거리 준비이다,
입을 옷이 많지도 않지만 조금 추워지면 입어야지 하고 챙겨두었던 옷들을 뒤로 하고 다시 겨울옷들을 준비해야 하다 보니, 몇 년간 걸쳐보지도 못한 옷이 있을 정도로 봄과 가을은 너무 짧게 느껴진다.
여름 내 입었던 흰색과 푸른 색 계통의 옷들을 벗고 가을 단풍처럼 알록달록, 따뜻한 색감의 옷들을 입고 싶었는데.....어느 새 니트와 모직 코트, 스카프를 챙겨야 한다.
거리 곳곳에서 마치 단체복처럼 검은 패딩을 입은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6시만 되어도 주변이 컴컴해지고 퇴근하는 차 속에서 차갑게 빛나는 달을 보는 날도 있다.
밝은 조명과 따끈한 음식,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귀소본능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가정의 식탁을 책임지는 주부들은 또 겨울 먹거리 중의 하나인 김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요즘은 사계절 내내 배추와 무 등 김장에 필요한 식재료들을 쉽게 구할 수 있고 김치도 원하면 언제든지 구매가 가능하지만 우리의 DNA 속에는 아직도 겨울 식량 확보에 대한 정보가 입력되어 있는 것 같다.
갓 지은 따끈한 밥 한 그릇에 먹음직스러운 양념의 김치 하나만 있어도 마음이 든든해진다.
어르신들이 “김치만 있으면” 하시던 말씀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배추는 꽃이 십자가 모양인 십자화과에 속한 식물 중 가장 중요한 속(屬, genus)으로 원산지는 중국이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재배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의서인 <향약구급방(1236)>에 배추가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전부터 재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향약’이라는 말은 향토에서 산출되는 약재를 의미하는데 배추는 무와 함께 채소이면서 민간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 중 하나였다.
음식에 대한 우리의 오랜 생각을 요약한 단어가 ‘약식동원(藥食同源)’이니 그리 낯선 일은 아닐 것이다.
배추는 ‘숭(菘)’, ‘백숭(白菘)’, ‘백채(白菜)’, ‘숭채(菘菜)’ 등으로 표기했다.
민간에서는 글자의 의미를 모른 채 소리 나는 대로 ‘배초(拜草)’라고 불렀다.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에서 “숭채는 방언으로 배초라고 하는데, 이것은 백채의 와전임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른다.”고 했다.
이렇듯 배추의 이름은 ‘숭’ 또는 ‘숭채’와 백채의 두 가지였으나 숭과 숭채는 사라지고 백채의 변형인 배추만 남았으니 배추는 백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백채(白菜)는 줄기 부분이 흰색이라서 붙인 이름인데, 다산의 시에 등장하는 숭저벽(菘菹碧)은 푸른 배추를 뜻한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의 배추는 지금의 배추와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의 배추는 불 결구배추로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결구배추보다 흰색 부분과 노란색 부분이 적었다.
어린 시절 즐겨 불렀던 노래 가사 중 ‘잠자리 날아다니다 장다리꽃에 앉았다’의 장다리는 배추 또는 무의 꽃이다.
장다리꽃이 피는 배추는 오늘날의 얼갈이배추 같은 것으로 푸른빛의 속이 차지 않은 불 결구배추다.
노랗게 속이 꽉 찬 결구배추는 중국 북부지방이 원산지이므로 호배추라고도 하며 쉽게 꽃이 피지 않는다.
불 결구배추는 18세기 중엽에 비로소 결구배추로 개량이 되었으나 기후조건 등으로 널리 재배되지 못하다가 19세기 말에 이르러 육종이 보편화되었으니 결구배추의 역사는 불과 100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체류시절 마트에서 보았던 배추도 얼갈이배추로 우리는 그것을 ‘기차배추’라고 불렀다.
가을이 되어야 비로소 프랑크푸르트에서 오는 결구배추를 구할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배추가 자주 등장하였지만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서거정(1420~1488)이 <사가시집 제40권>에 사돈이었던 안유문(安有文)이 보내온 배추를 받고 시를 남겼을 만큼 배추는 귀한 선물이었다.
경상북도의 경우 조상을 기리는 제사상에 반드시 배추 전을 올려야 했으니 별미 중의 별미였다고 할 수 있다.
날이 궂은 날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지져먹는 배추전은 정말 꿀맛이지만 이 맛을 아는 사람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배추전이라는 음식 자체가 지역적인 특성이 있긴 하지만 “배추로 전을?” 하며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제 배추는 흔히 말하는 특용작물이 아니다. 3~4월에 시설이나 노지에서 생산되는 봄배추부터 4~9월의 고랭지배추, 김장용 가을배추, 그리고 전라남도 해남이나 진도,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월동배추 등 사계절 내내 전국에서 생산하며 가격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저렴하지만 무와 고추, 마늘과 함께 4대 주요 채소로 인식되고 있다.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는 비타민 C와 칼슘, 인, 칼륨 등의 무기질, 그리고 섬유소가 풍부하여 영양가치가 높다.
배추의 겉잎에는 사과의 7배가 넘는 비타민 C가 함유되어 있으며, 속잎에는 시니그린(sinigrin)이 풍부하여 대장암이나, 유방암 등을 예방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배추의 인돌(indole)과 아이소싸이오시아네이트(isocyiocyanate) 성분은 해독작용이 있어 각종 염증과 암 예방에 도움을 준다.
95% 이상의 수분과 풍부한 식이섬유는 장내 환경을 개선하고 변비를 완화하며 다이어트에도 좋다.
배추는 찬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고추나 생강 등 따뜻한 성질의 양념이 들어가 찬 성질을 중화시켜준다.
올해 여름 긴 장마와 일조량 감소 등으로 한때 배추 한 포기가 1만원을 넘어섰을 때 과연 김장은 할 수 있을까? 아니 매일 김치는 먹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배추와 무의 값은 안정이 되었지만 고추는 작황 부진으로 생산량이 지난해보다 20∼30% 감소하였으며, 대파와 갓, 미나리도 가격이 올랐다.
올해 4인 가구 기준 김장비용은 전통시장에서 장을 볼 경우 약 32만 원이고 대형 마트는 37만 원으로, 지난 해 보다 20% 정도 김장 비용이 상승할 것이라고 한다.
유통 전문가들은 배추 값이 더 떨어지는 다음 주가 김장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한다.
유통업계는 11월 김장 시즌을 맞아 절임배추나 김장키트라 하여 일손을 덜어주는 상품으로 ‘김장 마케팅’을 펼치며 우리들의 저장본능을 자극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로 인하여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집에서 직접 음식을 만드는 것이 트렌드가 되었다.
예전에 비해 삼시세끼를 잘 챙겨먹는 반면 활동량이 줄다보니 ‘확찐자’라는 반갑지 않은 신조어도 등장하였다.
김치의 효능은 사스(SARS)와 메르스(MERS)를 통하여 이미 입증이 되었다.
특히 김치에 들어있는 유산균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으며 김치나 배추를 자주 섭취하면 감기를 예방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니 다이어트는 물론 코로나-19 예방을 위해서도 김장을 꼭 해야겠다.
겉잎이 녹색이고 반으로 잘랐을 때 속잎이 노란 것이 좋으며, 양손으로 눌러봤을 때 단단해야 속이 꽉 찬 것이라 하니 전통시장이나 마트에 가서 배추부터 골라 맛있는 김치를 담아야겠다.
잘 절인 노란 속잎에 굴을 넣은 김치 속과 돼지고기 수육을 함께 싸서 먹는 그 맛이야말로 김장의 백미가 아닐까?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넘어간다.
겨울에 특히 맛있는 김치찌개와 김치전, 김치쌈, 심지어 국물까지 김치는 묵어도 버릴 것이 없다.
냄비 바닥에 묵은 김치를 깔고 생선(캔도 가능하다) 토막을 얹은 후 양념하여 약한 불 위에 얹어놓으면 어느 새 윤기 흐르는 먹음직한 생선조림이 완성된다.
생선보다 묵직한 김치의 맛이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배추도 샐러드로 먹을 수 있다.
생으로 먹는 노란 속잎은 씹을수록 고소하고 심지어 달기까지 하다.
접시에 펼쳐놓으면 마치 꽃처럼 아름답다.
미국 있는 큰딸이 보이스톡을 했다.
이런 저런 안부를 묻고 무엇이 가장 힘드냐고 물어보니 음식이란다.
“엄마 한국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요, 내가 만든 김치는 왜 엄마 같은 맛이 안 날까?”하던 아이의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독일에서 늦둥이를 가졌을 때 어느 지인의 집에서 시어 꼬부라진 총각김치 한 꼬투리를 먹으며 눈물이 났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가깝기라도 하면 김치 통을 들고 당장 달려갈 텐데.....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하찮게 여겼던 모든 일상이 감사하고 그리워진다.
아이들이 정말 보고 싶다.
하루빨리 코로나-19가 종식되어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정상으로 되돌아가기를, 오늘도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인다.
연암대학교 외식산업과
백 승희 교수
(Nobember. 20. 2020)